학생인권조례는 진화해야 한다
김서영 이투데이 기자
1.7 vs 0.7
북유럽 국가들과 한국의 합계출산율 격차를 보면서 숨은 비결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국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묘수’가 아니고서는 숫자의 간극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였다. 2년 전, 한국을 저출산 수렁에서 건져 올릴 ‘비책’을 찾아 북유럽 출장길에 오른 이유였다.
취재할수록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다. 출산율을 견인했다며 나열한 정책 가운데 처음 들어보는 건 없었다. 육아휴직, 유연근무제, 무상보육···· 오히려 제도 측면에선 한국이 더 앞선 것도 있었다. 한국이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육아휴직을 보장한 건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아휴직 기간도 북유럽
국가들이
10개월인 데 비해 한국은 법률상 최대 1년을 보장하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의 가족정책위원회에서 출산·육아정책의 기틀을 마련했던 한 교수로부터 설명을 듣다가 “이거 한국도 다 있는 건데”라는 말이 불쑥 나왔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있으면 뭐해요. 적용이 안 되는데.” 한국 사정을 훤히도 꿰뚫었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0년 전 저출산 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었다고. 그때도 한국의 고민은 똑같았다며, 답을 몰라서 못 푸는 문제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그는 한국이 알아야 할 건 이거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노르웨이도 합계출산율 급락으로 국가 존립을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격렬한 토론을 거치면서 일과 가정 양립, 부모 공동육아, 국가 보육 의무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아이는 개인·기업·국가가 함께 키운다는 인식도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근무시간 주당 37시간, 4시 퇴근, 무상보육, 아빠 육아휴직이 차례차례 자리를 잡아갔다. 철학에서 제도가 나오니 힘이 실렸다. “육아는 부모의 특권”, “회사 눈치를 왜 보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됐다. 인식이 제도를 만들고, 제도가 인식을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된 것. 완성형은 아니다. 북유럽 국가들은 최근에도 법을 수정·보완해가면서 그들의 가치를 구현해가고 있다.
한국은 어떤가. 인식이 척박한 땅에 덜컥 제도부터 심었더니 후폭풍이 만만찮다. 육아휴직은 뭔가를 희생해야 누릴 수 있는 ‘그림의 떡’이다. 이달 초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발표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25~49세 성인 남녀 응답자 10명 중 8명이 경력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 육아휴직을 가장 필요한
정책으로 꼽았다. 18년째 제자리걸음인 셈이다. 정책 효과가 없으니 변죽 울리는 데만 18년간 360조 원을 쏟아붓고도 성적은 초라하다.
최근 서울시의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12년 제정된 학생인권조례가 구구절절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있어도 핵심은 하나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자신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남도 배려할 줄 알 것이라는 선한 기대를 전제로
말이다.
그러나 학교 현장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교사를 ‘동네북’쯤으로 폄하하는 일부 학생, 학부모들 탓에 ‘교실 붕괴’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연간 학교폭력 6만 건, 교권 침해 3천 건. 삐뚤어진 인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권리’는 상대를 공격하는 흉기로 변했다. 학생 인권만을 강조한 조례가 교사와 학교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외면해야 할 이유는 없다. 조례 제정 당시 벤치마킹했다는 뉴욕시의 ‘학생 권리 및 책임 장전’도 권리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학교에 징계권을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현장에서 아우성이 쏟아지고 있지만 10년도 전에 제정된 조례는 단
한 번 개정됐을 뿐이다. 이조차도 문제를 개선하는 부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싱가포르가 아시아 최고 국가로 성장한 비결엔 교육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배려하는 생각’을 촉진하는 ‘시민성 교육’이 중시된다.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는 “이상의 맹목적 적용은 사회 조직의 파멸을 낳을 수 있다”며
“한 사회의 법제는 그 이념의 훌륭함이 아니라 질서와 정의를 얼마나 잘 구현하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보기에 그럴듯한 조례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반영하면서 정교해져야 가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