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스케치

도심에 내려앉은 만추,
서울의 ‘조선왕릉’

어느덧 가을의 끝자락이다. 만추의 숲은 고요 속에 깊은 색채를 머금었다. 색바랜 단풍잎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어우러진 서울의 조선왕릉들. 낙엽 밟는 소리에 왕릉의 주인이 잠에서 깨지 않을까 하는 괜한 근심에 발걸음마저 조심스럽다. 가을을 즐기기 좋은 이맘때, 도심에 내려앉은 만추를 찾아 조선왕릉으로 향한다.

선정릉의 정릉이 소나무와 단풍에 에워싸여 있다. ⓒ한국관광공사
선릉과 정릉을 오가는 산책로가 호젓하다. ⓒ한국관광공사

도심 속 특별한 ‘단풍 섬’ 선정릉

선릉은 조선 9대 임금인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의 능이며, 정릉은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능이다. 두 능은 서울의 도심 강남구 한가운데 위치했다. 흔히 선정릉이라 부르는 이곳은 가을에 유난히 탐스러운 노란 은행잎 담장으로 유명하다. 이맘때 가로수길을 걸어봤다면 담장 너머로 보이는 울긋불긋한 숲에 저절로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표소를 거쳐 조붓한 숲길에 발을 들여보자. 도시의 소음이 왕릉의 담장을 넘지 못해서일까, 담장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한가롭기 그지없다.

선릉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을 따랐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곳에 능침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정자각을 기준으로 성종의 능은 왼쪽, 정현왕후의 능은 오른쪽에 있다. 능 옆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가면 문인석과 무인석을 마주한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강남의 빌딩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선릉에서 정릉까지는 산책로를 따라 600m 정도 가야 한다. 산책로는 숲과 분리돼 있으며, 오르내림이 적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이곳 산책로는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참나무 등 활엽수가 우거져 만추 특유의 운치가 짙다.

선정릉 홍살문 ⓒ국가유산청

아름다운 운치에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산책 코스로 인기가 높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걸음이 느리고,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유는 아마 숲이 선사하는 여유와 편안함 때문일 것이다.

중종의 정릉은 왕비의 능이 없는 단릉이다. 정릉이 지대가 낮아 비가 오면 침수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왕비의 능을 다른 곳에 조성했다. 안타깝게도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당시 파헤쳐져 재궁(관)이 불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릉과 정릉은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깊어가는 가을, 도심의 ‘단풍 섬’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02-568-1291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화~일요일 오전 6시 30분~오후 5시 30분 (매주 월요일 휴무)

지금이 산책하기 딱 좋아, 태강릉

태릉의 정자각 뒤로 능침이 보인다. ⓒ양영훈 작가
다양한 석물이 강릉을 지키고 있다. ⓒ 양영훈 작가

태릉은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강릉은 그녀의 아들인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이다. 이 두 능을 합쳐 태릉과 강릉이라 부르는데, 흔히 ‘태강릉’이라고도 한다. 두 능은 가까이 있을 것 같으나 입구가 따로 있을 정도로 서로 떨어져 있다. 두 능을 잇는 숲길은 봄가을에만 개방돼 이맘때 이곳을 찾는다면 행운이다. 숲길은 1.8km가량으로, 11월 30일까지 개방한다. 왕의 산책로라 할 만큼 숲이 호젓해 이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매표소를 지나면 조선왕릉전시관을 마주한다. 조선왕릉에 관한 자세한 정보와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까지 챙길 수 있으니 반드시 방문하길 권한다.

전시관을 나서면 홍살문 앞까지 숲길이 펼쳐진다. 참나무와 소나무가 뒤섞여 울창한 숲을 이뤄 깊은 산림욕장에 온 듯하다. 나무들은 경쟁하듯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었다. 다른 나무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이 자라야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게 나무의 ‘탐욕’이라면 그 결과는 매우 아름답다. 태릉의 주인인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열두 살에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내세워 권력에 탐욕을 부렸다. 매관매직이 빈번했고, 지방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났다. 나무의 탐욕에 비해 인간의 탐욕은 결코 아름답지 못하다는 점에서, 어쩐지 씁쓸함이 느껴진다.

태강릉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 양영훈 작가

02-972-0370

노원구 화랑로 681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 30분(매주 월요일 휴무)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을 품은 헌인릉

쌍릉으로 조성된 헌릉의 정자각 ⓒ 국가유산청

서초구에 위치한 헌릉과 인릉은 출퇴근 시간이면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러시아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로워 주말 나들이에 적합하다. 헌릉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이고, 인릉은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이다. 이곳의 공식 이름은 ‘서울 헌릉과 인릉’이며, 사람들은 ‘헌인릉’이라 부른다. 두 왕의 재위는 20대에 이르는 세월의 간격을 두고 있다. 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같은 곳에 나란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헌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이고, 인릉은 한 봉분에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이곳 역시 두 능을 오가며 걷기 좋은 숲길이 있다.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오리나무 숲으로 그 길이가 600m 정도다. 헌릉과 인릉 능침은 상시로 능침 옆 관람로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능 아래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니 두 풍경 모두 즐겨보길 추천한다.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 국가유산청
정자각 뒤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보인다. ⓒ 국가유산청

02-445-0347

서초구 헌인릉길 34

화~일요일 오전 9시~오후 5시 30분(매주 월요일 휴무)

여행 TIP

서울시에는 여기 소개한 왕릉 외에도 의릉과 정릉이 있다. 의릉은 조선 20대 임금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이고, 정릉은 조선 1대 임금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두 곳 모두 성북구에 있다.

문의 궁능유적본부 02-6450-3800
조선왕릉관리소 중부지구관리소 02-972-0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