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스케치

미래세대에 전해야 할
오래된 가게 ‘서울미래유산’

백제는 기원전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성백제 시대를 열었고, 조선은 600년 넘게 서울을 수도로 삼았다.
서울은 5000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아 올린 유무형의 산물인 셈이다. 그중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미래세대에 전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선정한 서울미래유산 세 곳을 소개한다.

서울의 대장간 불광대장간

건설업이 한창 호황이던 1970~1980년대 을지로에는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제작하던 대장간이 여럿 있었다. 그 대장간들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엔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를 일컬어 ‘야장(冶匠)’이라 불렀으며,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 그러다 1907년 정미조약 이후 해산과 동시에 전국으로 흩어졌다.

2021년 현재 서울의 대장간은 모두 열 곳. 그중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장간은 ‘불광대장간’을 비롯해 네곳이다. 불광대장간은 은평구 대조동에 있다. 1대 대장장이 고 박영원 옹은 강원도 철원에서 상경해 돈암동, 미아리 등지에서 대장간 일을 배웠다. 기술을 익힌 그는 1960년대 중반 불광초등학교 인근 개천가에서 이동식 대장간을 처음 열었고, 1973년 서부시외버스터미널(불광터미널) 앞에 정식 대장간을 차렸다. 인근에 공사가 많아서 장사는 곧잘 됐다. 직원도 2명이나 있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게를 옮길 형편에 놓여 1978년 현 위치에 문을 열었다. 가게를 옮겼지만 단골들은 꾸준히 찾아줬고, 장사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불광대장간은 장정 서너 사람이 서 있기에도 좁을 만큼 매우 협소하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눠 사용하고 있다. 도로와 접한 상품 전시 공간, 골목의 보조 작업 공간, 화덕이 있는 실내의 주 작업 공간과 창고, 사무 공간 등이다.

현재 불광대장간은 아들 박상범 씨가 2대 대장장이로 대를 잇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대를 잇기로 결심한 것은 군대에 입대한 이후라고 한다. 휴가를 나와서 보니 직원이 없어 어머니가 힘든 대장간 일을 돕고 있더라는 것. 사실 대장간 일이 초보자가 하기엔 위험하고 고되다 보니 직원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대장간을 꾸려나갔던 것이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휴가나 외박을 나올 때면 틈틈이 대장간 일을 도왔고, 그러다 보니 박상범 씨의 경력도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쇠를 화덕에 달궈 망치로 두들기고 잘라내 모양을 만들어내는 옛 방식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작은 도끼 한 점을 만드는 데만 한나절이 걸린다. 그런데도 옛 방식을 지키는 이유는 기계로 만든 것에 비해 쇠의 구조가 촘촘하고 치밀해 품질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처음엔 고생하는 부모님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대장간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땅땅땅’ 쇳소리 내며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불광대장간 2대 대장장이로.

불광대장간(서울미래유산 2013-115호)
  • 주소

    은평구 통일로69길 15(불광역 7번 출구에서 305m)

  • 문의

    02-353-8543

서울의 오래된 인장포 박인당

‘도장에 대해 많이 안다’라는 뜻의 ‘박인당’은 1978년 문을 연 인장포다. 1938년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태어난 창업주 박영호 옹은 거제도 피란 시절 인장 새기는 일을 시작했다. 산에서 나무를 잘라 도장을 만들어 피란민들에게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중 박 옹의 손재주를 눈여겨본 친척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와 인장 기술을 익혔다. 더불어 서예가 겸 전각가였던 김두칠 선생으로부터 좌서, 전서, 예서, 초서 등 서법도 배웠다.

서울에 온 지 10년이 되던 해인 1964년, 마침내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을지로5가에 있던 부흥인쇄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빌려 인장포를 연 것이다. 경험과 기술이 축적된 터라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밤을 지새우며 일한 결과 큰돈도 벌었지만, 시련도 많았다. 가게를 옮긴 뒤 손님이 끊기기도 했고, 사기도 당했으며, 건물 증축 공사를 한다는 이유로 가게를 여러 번 옮기기도 했다. 그때마다 예문사, 창문사로 상호를 바꾸며 심기일전했지만 여의찮았다.

우여곡절 끝에 빛을 발하게 된 것은 1978년 관철동에 ‘박인당’을 개업하면서부터다. 그 무렵 인장 관련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고, 여러 서법과 도법을 꾸준히 연구했다. 그 결과 2004년 인장공예로 최고 기능인 ‘명장’ 칭호를 받았다.

여태껏 박인당이 자리한 곳은 종로의 오래된 상가나 빌딩이었다. 그 덕분에 항상 재개발 이슈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지만, 종로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바로 오래된 단골 때문이다. 2024년 11월에도 대신빌딩에서 경영빌딩 302호로 이전했다.

많은 업무가 디지털화되면서 인장의 사용 빈도가 줄어들고 있지만, 박 옹의 인장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박 옹은 80세가 넘은 고령에 포토샵을 독학으로 배웠고 컴퓨터로 고객을 관리한다. 젊어서부터 주경야독이 몸에 밴 까닭도 있지만,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는 신념과 박인당에 담긴 뜻처럼 도장에 대해 많이 아는 명장다운 명장이 되기 위해서일 테다.

박인당(서울미래유산 2020-004호)
  • 주소

    종로구 88 경영빌딩 302호

  • 문의

    02-733-3429

4대째 이어온 서울의 떡집 낙원떡집

설날 음식을 꼽자면 떡국을 빼놓을 수 없다. 떡국을 먹어야 비로소 한 해가 시작되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곳이 떡집이다. 세대가 바뀌었다지만 차례상에 올릴 떡을 준비하는 건 우리 민족만의 DNA가 아닐까.

‘낙원떡집’은 떡과 관련한 유일한 서울미래유산이다. 일제강점기에 1대 고이뻐 씨가 종로구 원서동에서 상궁에게 궁중떡 만드는 법을 배워 행상을 시작한 뒤 이곳 낙원동에 가게를 열고 자리를 잡았다. 낙원떡집은 2대 김인동 사장을 거쳐 3대 이광순 사장, 4대 김승모 사장으로 이어져 가업을 잇고 있다. 그 기간만 무려 100년 이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떡집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다.

이 떡집은 방부제와 연화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날 만든 떡은 그날 판매하고, 그날 먹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냉동 보관해야 한다. 이러한 고집 덕분에 이곳은 수십 년 된 단골은 물론이고 멀리서도 여전히 찾아오는 ‘찐’ 단골이 많다. 청와대는 이 집의 단골 중 단골로, 60년간 떡을 주문했다. 하지만 먹을거리가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입맛이 변한 탓에 이전에 비해 떡을 찾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고 있다. 한때 낙원동 떡집 골목에는 30여 곳이 있었지만, 요즘은 떡집 골목이란 말이 낯설기만 하다. 4대 김승모 사장이 새로운 떡을 개발하고, 생산과 판매에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가 미래세대에 전해야 할 것은 일상에서 즐기는 떡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낙원떡집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오고 있다.

낙원떡집(서울미래유산 2013-043호)
  • 주소

    종로구 삼일대로 438(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197m)

  • 문의

    02-732-5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