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주의회를 공식 방문한 최호정 의장과 서울시의회 대표단(2024. 9. 25.)
예산에서 시작되는 정책
독일의 한 중소도시. 낡은 도서관을 리모델링할지, 어린이집을 증축할지를 두고 주민 설명회가 열린다. 논의는 곧바로 예산으로 이어진다. 어느 사업이 더 시급한지, 추가 재원은 어떻게 마련할지, 세율 조정이 필요한지까지 테이블 위에서 다뤄진다. 독일에서 이런 장면이 가능한 것은 재정 권한이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재정 권한이 지역에 없는 구조라면 풍경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민들이 아무리 필요성을 이야기해도 예산은 그 자리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사업은 상급 기관의 심사와 중앙 예산편성 과정을 거쳐야 하고, 자체 재원이 부족하면 다음 해로 미뤄지기 쉽다. 세율을 조정해 재원을 보완하는 선택지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주민 설명회라도 재정 권한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정책의 속도와 실현 가능성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독일은 강한 분권이 이뤄진 연방주의 국가다. 행정 체계는 연방정부, 16개 주정부, 기초자치단체인 게마인데(Gemeinde)와 이를 연결하는 크라이스(Kreis)로 이어진다.
주정부는 중앙의 하위 기관이 아니라 헌법에 의해 독자적 입법권과 재정권을 가진 국가 운영 주체다. 게마인데는 교육, 사회복지, 교통, 소방, 도로·공원 관리, 토지 이용, 건축 계획까지 생활행정 전반을 책임지는 지방자치의 중심이다.
크라이스는 여러 게마인데가 단독으로 시행하기 어려운 사회·경제·문화 업무를 지원한다. 이 구조를 떠받치는 원리가 보충성의 원칙과 견련성(서로 연관돼 관계를 가지는 성질)의 원칙이다. 가능한 한 가장 작은 단위가 먼저 사무를 맡고, 감당하기 어려울 때만 상위 단위가 역할을 이어받는 것이 보충성의 원칙이며, 사무를 맡긴 주체가 재정까지 함께 책임지는 것이 견련성의 원칙이다.
두 원칙은 독일 기본법에 명시돼 있으며, 권한이 내려오면 재정이 반드시 함께 따르도록 하고 있다.
독일 공동세 배분 비율(2023년 기준)
OECD 국가의 지방세 비중(2022년 기준)
교부 아닌 배분, 공동세로 완성되는 재정 자치
독일은 연방정부가 주정부와 지방정부에 세금을 ‘교부’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법으로 연방과 주, 지방자치단체 간 조세 수입 배분 구조를 명확히 규정해 동등한 조세 주권을 전제로 세원을 공유한다.
조세는 개별세와 공동세로 구분되며, 소득세·근로소득세·법인세·매상세·이자세 등 다섯 가지 주요 세목이 공동세에 해당한다. 이 공동세가 독일 전체 조세 세입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그 재원은 연방정부와 주정부, 지방자치단체가 일정 비율로 나눈다.
지역 간 산업구조 차이로 발생하는 세수 격차는 주정부가 1차로 조정하고, 주정부 간 재정 불균형은 연방정부가 다시 조정한다. 연방정부와 주정부, 지방자치단체가 세원을 함께 나누는 수평적 재정 조정 제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 덕분에 지역의 살림살이가 달라도 기본 공공서비스는 전국적으로 일정한 수준이 유지된다. 예산을 쥔 곳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함께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행정은 빠르면서도 현실적으로 움직인다.
독일 기본법 제70조는 연방의 입법 영역을 외교, 국방, 통화, 철도, 우편, 전국적 재난 대응 등으로 제한하고, 그 외 생활행정은 주와 지방자치단체의 몫이다. 재정권한 역시 이 구조에 맞춰 설계돼 게마인데는 예산을 직접 편성하고 세입과 세출을 조정하며 정책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정한다.
세금을 지역에서 걷고, 지역에서 쓰며, 그 성과와 책임까지 지역으로 환원하는 재정 순환구조 속에서 독일의 지방자치는 실제 권한으로 작동한다. 독일에서는 재정이 곧 자치의 언어가 되고, 세금이 곧 정책의 방향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독일지방자치제도와 지방재정>(2017)
국회예산정책처 연구용역 보고서 <주요국의 재정분권 추진 현황과 시사점>(2018)
재정정책연구원 <국제기준 지방세 도입방안>(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