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으로 완성한 자치 분권
프랑스는 오랫동안 국가의 힘이 수도 파리에 집중된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다. 모든 결정을 중앙정부가 내리다 보니 지방정부는 시키는 일을 집행하는 역할에 머물렀고, 지방의회 역시 지역 살림을 주도할 만큼 힘이 세지 못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다.
1982년에 도입된 『지방분권법』은 지방의회가 주민의 대변인으로서 지역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중앙정부의 사후 승인 없이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특히 2003년에는 헌법개정을 통해 프랑스의 국가 운영 원리에 지방분권을 명시하며 자치를 정권에 상관없이 반드시 지켜야 할 ‘헌법적 권리’로 못 박았다.이는 지방자치를 법률이나 관행에 맡겨 둔 채 중앙정부의 판단에 따라 권한이 오르내리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정 운영 책임까지 함께 지는 지방의회
프랑스의 지방정부 체계는 코뮌(Commune, 시읍면), 데파르트망(Département, 도), 레지옹(Région, 광역) 3단계로 나뉜다. 모든 단계에는 주민이 직접 뽑은 지방의회가 있으며, 이들은 각 층위에서 지역 예산과 정책을 독립적으로 결정한다. 코뮌 의회는 일상적 사무를, 데파르트망 의회는 복지와 보건을, 레지옹 의회는 광역 경제 정책을 주도한다. 프랑스 지방자치의 가장 큰 특징은 의회와 집행부의 관계 설정 방식에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방의회 다수파가 집행부 수장을 선출하고, 행정 운영의 책임을 함께 진다. 의회가 집행부를 외부에서 견제하는 구조라기보다 의회 다수파가 행정까지 책임지는 ‘의회 책임형 자치 구조’에 가깝다. 정책 실패의 책임 역시 의회와 집행부가 함께 지는 방식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각각 선출하는 구조로, 권한과 책임이 분리돼 갈등이 반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인구 감소와 행정 여건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소규모 코뮌들이 연대해 ‘메트로폴(Métropole, 대도시 연합)’ 같은 협력 기구를 구성하고 있다. 교통, 환경, 도시계획처럼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를 지방의회 간 협력을 통해 공동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다. 지방의회 간 연대로 문제를 풀어가는 점에서 우리 지방자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재원 이양 원칙, 지방 균형발전의 토대
프랑스 지방의회가 실질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비결은 ‘돈’과 ‘권한’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헌법 제72-2조에는 ‘견련성(서로 연관돼 관계를 가지는 성질)의 원칙’이 담겨 있다. 국가가 지방에 업무를 이양할 때는 반드시 그 일을 처리할 예산도 함께 넘겨야 한다는 약속이다. 덕분에 지방의회는 단순히 예산을 배분받는 수준을 넘어 정책에 맞춰 스스로 예산을 설계하는 ‘재정적 자기결정권’을 갖게 됐다.
또한 프랑스 지방의회는 법령이 정한 범위 내에서 주요 지방세의 세율을 직접 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프랑스 지방정부는 중앙 이전 재원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법적으로 보장된 수준의 자체 재원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특히 프랑스 법은 지자체의 자체 재원 비중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례는 지방자치가 단순히 사무를 나누는 일이 아니라 지방의회가 독립적으로 주민의 삶을 책임질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일임을 보여 준다. 민선 지방자치 30년을 맞은 우리에게 프랑스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국가 운영의 기준이 되는 『국회법』이 있듯, 지방의회에도 그 지위와 권한을 당당히 보장하는 『지방의회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랑스가 헌법과 법률로 지방의회의 독립성을 보장했듯, 우리 역시 제도적 결단을 통해 지방자치의 본질을 완성해야 한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방자치 30년 평가 기초연구>(2024)
행정안전부 <민선 지방자치 30주년 평가 및 지방자치 미래 비전 발표>(2025)
한국지방세연구원 <프랑스 행정체계 변화에 따른 지방재정제도 개편과 시사점>(2024)
한국법제연구원 <주요 외국의 지방자치제도 연구 – 프랑스>(2018)
고양시정연구원 <프랑스 수도권인 ‘일드프랑스’와 대도시권 ‘그랑프리’의 변천>(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