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흔적을
지우고
되찾은
서울의 지명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의 비극은 사람에게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딛고 선 땅조차 서슬 퍼런 일제의 칼날 아래 ‘창지개명’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광복 이후 끈질긴 노력 끝에 식민의 상흔을 씻어냈고, 비로소 우리 언어로 된 지명이 서울 곳곳을 다시 채웠다.

참고

서울역사편찬원,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사진

서울연구데이터서비스,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 서울관광재단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을 지닌 노들섬

가운데 섬 중지도에서 본래 이름을 찾은
노들섬

한강대교 중간에 위치한 타원형 모양의 노들섬은 비교적 최근까지 일본식 명칭으로 불렸다. 1917년 일제강점기 시절에 만든 인공섬으로, 일제는 가운데 섬이라는 뜻의 ‘중지도’라 이름 붙였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서정적인 뜻을 지닌 우리말 노들이며, 주변 나루터 역시 노들나루라고 불렀다.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관습적으로 중지도로 불리다 제2중지도는 1987년 선유도로, 제1중지도는 1995년 일제식 지명 변경 사업을 통해 노들섬으로 바뀌며 아름다운 제 이름을 공식적으로 되찾게 됐다.

조선 진출의 교두보가 된 죽첨정
충정로

이 일대는 강화도조약 이후 최초의 일본 공사관이 들어서면서 일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결정적 교두보가 됐다. 일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갑신정변 때 조선에 온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본떠 이 지역을 ‘죽첨정’이라 불렀다. 우리 민족에게는 침략의 발판이 된 뼈아픈 장소였기에 광복 이후 일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새로운 이름을 고심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해 자결로써 항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아호를 따서 이곳을 ‘충정로’라 명명했다. 일제의 공사 이름을 지우고 우리 충신의 넋을 기리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비로소 땅의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웠다.

식민 지배 상징 명치정에서 밝은 마을로
명동

서울의 대표 관광지 명동은 조선 시대에 명례동이나 명례방골이라 불렸다. 이는 조선 초 한성부 행정구역 설정 당시 남부 명례방의 ‘명’ 자를 딴 것에서 유래했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명치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울 중심부에 일본 메이지 일왕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당시 시대적 아픔이 서린 대목이다. 광복 이후 명치정에서 ‘치’를 빼 ‘밝은 마을’이라는 뜻의 명동으로 개칭했다.

일제 본거지 본정통의 아픔이 서린
충무로

충무로는 일제강점기 경성의 심장부이자 일본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번화가였다. 1885년 무렵 일본 공사관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며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고, 이후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이라는 뜻의 본정에 ‘길’을 뜻하는 통을 붙여 본정통으로 명명했다. 광복 이후 일제 본거지라는 치욕스러운 흔적을 지우고 침략의 상처를 씻어낼 새로운 이름이 절실했고, 인현동 인근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격퇴한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서 ‘충무로’라 명명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다시 세웠다.

옛 지명에 일본식 지명을 붙인 황금정
을지로

중구 을지로 1·2가 사이에는 땅이 질어 햇볕에 구리처럼 반짝이던 ‘구리개’라는 고개가 있었다. 19세기 말 일본인들이 상업·금융 시설을 세우며 이곳을 ‘황금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구리개라는 옛 지명에 화려한 상권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일본식 지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광복 이후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로’라 명명했다. 단순히 일본의 흔적을 지우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 을지로 일대에 형성돼 있던 강력한 화교 상권을 견제하려는 전략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기개를 빌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도심 상권의 주도권을 되찾고자 했다.

침략자의 이름이 새겨진 장곡천정
소공동

한국주차군 사령관이자 제2대 조선 총독으로 국권 침탈에 앞장선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거주했다는 이유로, 일제는 이 일대 지명을 그의 성을 딴 ‘장곡천정’이라 불렀다. 광복 후인 1946년 일제식 동명을 우리 이름으로 바꾸면서 ‘소공동’이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소공동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인 경정공주와 부마 조대림의 저택이 있어 이 동네를 ‘작은 공주골’이라 불리던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