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에 지어 격동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서울시의회 본관. 얼핏 보면 현대식 건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근대화 시기 건축양식을 띤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시계탑이다. <서윤영의 청소년 건축 특강>(철수와영희)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 중에는 경성역사나 경성부 청사처럼 시계탑이 설치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시계는 첨단 기기로 일반 서민은 갖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형 공공건물에 시계탑을 세워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시계는 문화적으로도 근대문명의 상징이었다. 당시 공공건물의 시계탑은 부정확한 시간 개념에 기인하는 대한제국의 나태와 무질서를 계몽한다는 의도도 담고 있었다. 시의회 시계탑도 같은 의도로 세워졌다.
시계탑의 역사는 시의회 본관의 최초 이름인 부민관으로부터 시작된다. 1935년 일제는 경성시민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국 최초 근대식 다목적 회관을 짓고 이름을 ‘부민관’이라고 했다. 1800석 규모의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 소강당 등에서 연극,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작품을 공연했다.
부민관은 항일투쟁의 대표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1945년 독립운동가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이 다이너마이트 폭파 의거를 벌인 곳이 이곳 강당 안이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경성 한복판에서 일제와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대표적인 의거로 꼽힌다.
부민관은 광복 이후 잠시 미군정청과 국립극장으로 사용됐고, 1954년부터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 이후 국회의사당은 1975년 여의도로 옮겨갔고,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활용됐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되며 현재까지 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시계탑이 설치된 시의회 본관은 당시 보기 드물게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은 건축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국가등록문화재 제11호로 등록됐다.
시의회는 시계탑 복원과
연계해 기존 대형
휘장과 사인물을 철거해
권위적인 의회의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서울의 옛 모습 찾기’ 일환으로 복원된 시계탑
시의회 시계탑은 건축 당시 경성 시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지금의 N서울타워나 롯데타워처럼 경성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이후 40년간 서울 한복판에서 시간을 알려주던 시계는 1975년경 어떤 이유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철거됐고 탑만 남아 있었다. 시계탑 복원은 올해 6월 시민 단체 (사)한국의재발견이 ‘서울의 옛 모습 찾기’ 일환으로 시의회에 본관 시계 설치에 대한 지정 기탁 제안을 하면서 추진됐다.
시의회는 국가기록원을 통해 건립 당시 설계도서를 찾아 처음부터 시계탑의 시계가 설치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 최근까지 사진 자료를 근거로 시계 운영 방식과 모양을 추정해 밑그림을 그리고 문화재청과 서울시로부터 추천받은 문화재위원들의 조언을 받았다. 시계탑을 복원하면서 서울시의회 대형 휘장과 간판을 철거하고 50년 전과 같은 모양의 아날로그시계로 본관 건물 3면에 총 3개를 설치했다. 또한 밤에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자체 발광 기능을 추가했다.
김현기 의장은 “시계탑 복원과 연계해 기존의 대형 휘장과 사인물을 철거해 권위적인 의회의 모습에서 탈피하고자 했다”면서 “영국 런던 국회의사당의 빅벤, 독일 뮌헨의 시청사 시계탑처럼 시의회 시계탑이 서울을 대표하는 관광명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40년간 격동의 역사를 함께해오다 50년 만에 복원된 서울시의회 시계탑.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문화재 보존의 좋은 사례로, 그리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회를 상징하는 런던의 빅벤처럼 서울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봉사하는 ‘시민 의회’의 상징으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빅벤(Big Ben)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궁전 엘리자베스 타워 내부에 설치된 대종(大鐘)의 이름이다. 시민 의회의 상징으로 지름은 약 274cm, 무게는 13.5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