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
(MBN 기자)
“시의회라면 청년을 끌어들여 청년층의
정치 무관심을 바꾸고 세대론으로 나뉜 기성세대와
MZ세대의 가상선을 지우기에도 용이하다.”

현대사회는 한 시대에 다양한 시간의 흐름이 공존한다. 20세기 초 인문학자 에른스트 블로흐가 말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시 독일 사회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복잡하게 얽힌 균열 사회였고, 학자들은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요소들이 한 시대에 공존한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세대가 각자 문화를 향유하는 동시에 다른 세대의 문화를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허구적 세대론에 길들여졌다. 각종 SNS와 TV 프로그램은 MZ세대와 기성세대의 다름을 규명한다. 각자 살아가는 문화와 관습이 다르지만, 이것이 적대적 논리처럼 여겨지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요즘 MZ세대는 이렇다. 기성세대는 꼰대다’라는 언어 속에서 특정 연령대를 손쉽게 낙인찍는다. 그렇게 ‘위선의 586’, ‘영끌 30대’, ‘이대남, 이대녀’의 이분법적 논리가 우리를 계속 가두고, 한국 정치도 이를 자연스럽게 따라간다. 정치에서도 세대를 나누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인과 뉴페이스 속에서 ‘용퇴론’ 등 다양한 담론이 세대를 끊임없이 구분했다. 정치만큼은 이 허구의 영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국 정치는 여태껏 피상적 아이디어 속에서 생각이 구체적 층위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대론의 허상까지 얹히면 새로운 아이디어는 편견에 갇히기 마련이다.

시의회라면 세대론의 허상을 얼마든지 타파할 수 있다. 국회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정책의 파급력은 더 강하기 때문이다. 조례를 발의해 실효성을 높일 가능성도 크다. 청년층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바꾸고 세대론으로 나뉜 기성세대와 MZ세대의 가상선을 지우기에도 용이하다. 문제는 ‘청년’을 필요로 하지만 언제나 뒷전인 ‘청년’이다. 표를 얻어야 하는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촛불과도 같다. 예전 국회에서 여야를 책임지던 젊은 수장처럼 찰나의 시간 동안 보여주기식 2030이 다였다. 시의회도 마찬가지다. 기초의회에서 청년을 위한 위원회는 찾아보기 어렵다. 청년이 참여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정책이 드물다. 정치인이 청년 정치인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단지 비교적 ‘적은’ 나이에 국한된다. 현재 서울 청년의 니즈가 무엇인지, 청년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정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논의도 적다.

청년이 정치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이들을 이끌어줄 수 있는 시니어의 발자취가 중요하다. 현재 정치는 여야의 줄다리기에만 집중한다. 이번 시정질의에서도 반대 진영 교육감의 연설이 적절치 못하다며 정회를 10시간 가까이 끌고 이에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년 정치인은 자연스럽게 진영의 싸움을 답습할 수밖에 없다.

한번은 시정질의에서 한 초선 청년 의원이 “왜 초중고 학생회장들은 임명장을 주냐. 선출직인데 당선증을 주어야 한다”라는 질의를 들은 적이 있다. 신선하고 새로운 시각이었다. 정치인들은 ‘어떤 청년 정치’에 대해 규명 짓고 각자 네이밍을 통해 청년 정치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우리 정치가 세대론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규명보다는 청년이 내후년의 정치를 책임질 수 있는 멘토링이 절실하다.